보도자료[한겨레] “느린학습자도 당당한 시민입니다”


경계선 지능인 권익옹호 위한 ‘느린학습자시민회’ 오미정 이사장


장애·비장애 경계로 복지 사각지대


2016년 부모 모임·지역사회 손잡고


워킹그룹 활동 거쳐 4월 법인 설립


“생애주기 맞춤 지원, 포용사회 꿈꿔”



4월30일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느린학습자 마을배움터’에서 오미정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이 하트 모양 풍선을 안고 서 있다. 뒤에는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이 그린 자화상이 전시돼 있다. 느린학습자시민회는 느린학습자 권익옹호 활동을 펼치기 위해 지난 4월 출범했다.


느린학습자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다. 지적장애는 아니지만, 이들의 지능 수준은 ‘경계선 지능’(지능지수 71~84)으로 평균보다 대체로 낮다. 학령기엔 학업 성취도가 여느 아이들에 견줘 떨어지고 또래의 따돌림 등으로 자존감이 낮다. 의사 표현이 서툴러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다반사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의 검프처럼 말이다. 성장하면서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이들 앞에는 넘어야 할 높은 벽이 있다.


지난달 사단법인 ‘느린학습자시민회’가 출범했다. 느린학습자는 학령기 인구의 12~13%로 전국에 80만 명가량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 초중등교육법 개정으로 학습권 보장을 위한 수준별 분반 수업 등이 이뤄지고 있지만, 현실엔 큰 변화가 없다. 시민회는 느린 학습자 권익 옹호를 위한 활동을 펼쳐 이들이 지역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


4월30일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느린학습자 마을배움터’에서 오미정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을 만났다. 시민회는 배움터 옆 공간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현재 마을배움터에는 중고등학생 9명이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고등학생과 초등생을 위한 주말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다. 배움터 곳곳에 자화상 등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만든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오 이사장은 “아이들이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고 많이 뿌듯해한다”고 전했다. “2년 가까이 공석이었던 담당교사가 최근에 뽑혀 이제야 질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느린학습자시민회 이름은 오 이사장이 두 가지 바람을 담아 직접 지었다. 하나는 느린학습자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점이다. 그는 “장애·비장애의 경계로 정책 사각지대에 있지만 느린학습자도 시민의 권리를 자기 삶으로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누구든 차별받지 않는 포용사회가 될 수 있게 시민들이 함께 풀어갔으면 하는 점이다. 시민회 발기인과 회원으로 부모, 시민활동가, 연구자, 복지사 등 20여 명의 다양한 주체가 참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 이사장의 아들은 어릴 때 언어발달이 늦었다. 치료해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검사에서 경계선 지능인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초등 저학년일 때는 인지 치료 등을 위해 거의 매일 치료센터를 다녔다. 오 이사장은 아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학업 능력 향상이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상에서 꾸준히 교육이 이뤄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다른 엄마들과 2015년 자조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지역의 부모 대상 코칭 강사 양성 과정에도 참여했다.

2016년 성북아동청소년네트워크에서 느린학습자의 일상적인 방과후 교육 지원에 뜻을 모으며 부모 모임과 지역사회가 머리를 맞대게 됐다. 공동추진단을 만들어 공간을 빌려 방과후 공부방을 열었다. 처음은 지역 공공 공간을 빌려 쓰는 거로 시작했다. 공간 활용이 쉽지 않아 어렵사리 종암동에 느린학습자 마을배움터를 마련했다. 부모들이 십시일반 모아 보증금과 운영비를 충당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오 이사장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책적인 뒷받침과 사회적 인식 개선이 있어야 아이들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했다.


다음해엔 동북권 엔피오(NPO)지원센터의 공익활동 촉진사업으로 느린학습자 워킹그룹이 만들어졌다. 다른 지역의 부모 모임, 지역 기관 등 20여 곳이 참여했다. 그가 워킹그룹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았다. 용어부터 회의 진행 등 모든 게 그에겐 처음이라 어렵고 힘들었다. 그는 “동북권 엔피오지원센터와 공동추진단의 지원이 있어 해낼 수 있었다”며 “울면서 했지만 속은 시원했다”고 했다. 아들이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너무 답답했는데 워킹그룹 활동을 하면서 실마리를 찾았단다.


2019년 느린학습자 부모 대상 설문조사를 해봤더니 단체 설립 등의 욕구가 강했다. 추진위를 만들고 조직 설립에 속도를 냈다. 지난해 출범을 목표로 했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계속 미뤄졌다. 대신 외부 자원을 연계하는 노력을 이어갔다. 아름다운재단 공익단체 인큐베이팅 공모 사업, 서울시 참여예산 광역협치형으로 느린학습자 자립 지원체계 구축사업을 함께 제안해 선정됐다.


마침내 4월24일 창립총회가 열렸고, 그는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임기는 3년이다. 사실 그는 지난해 하반기 크고 작은 수술을 잇달아 3번이나 받아 건강이 좋지 않다. 6개월 동안 입원과 퇴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산소호흡기를 여러 번 꽂아 이빨이 4개나 빠질 정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공론장, 시민회 출범 준비 등을 챙겼다. 운영위원회에 함께했던 부모들이 코로나19로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하나둘 빠졌다. 부모 운영위원은 이제 그를 포함해 2명만 남았다. 그는 시민회가 느린학습자 권익옹호 단체로 자리 잡고, 배움터 운영이 안정되는 게 자기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맡은 일에 ‘올인’하는 성격 탓이라고 하지만 그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얼마 전 오 이사장은 오랜 고민 끝에 아들에게 그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줬다. 군대, 진로 등의 문제가 점점 다가오기에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다. 아들은 배움터에 더는 오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지켜볼 생각이다. 오 이사장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되면 숲으로 갈 계획이다.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산과 숲에서 일한 추억이 그에겐 큰 힘이 된단다. “고향 공주로 가서 숲해설을 하며 지내고 싶다”며 오 이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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